미스터리를 쓰는 방법미스터리를 쓰는 방법 - 10점
미국추리작가협회 지음, 로렌스 트리트 엮음, 정찬형.오연희 옮김/모비딕


글을 쓰는 것은 괴롭고 또 즐거운데 사람마다 어느 과정에서 괴로워하는지는 다른 것 같다. 이 책에는 많은 작가들이 자기 경험을 털어놓고 있는데 솔직하기라는 원칙을 받들며 쓴 것들이라 여겨진다. 나를 위로한 것은 작가들이 이야기를 짜는 것 자체에서 가장 큰 고통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일단 세밀한 경계들을 대충 뭉뚱그려 두고 얘기하자면, 줄거리 또는 플롯 또는 개요처럼 어느 정도 진행 과정과 결말을 드러내야 할 기초 공사에서 작가들은 모든 힘을 쏟아붓는다. 이게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최대한 길게 회피하려 애쓰는 작가들도 있었다. 언젠가 마주쳐야 할 거야. 그러나 지금은 아니지. 창작자들이 겪는 소위 마감병이 이런 데서 유래할지도. 역시나 대부분은 시작할 때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하고 몇몇 소수만 알고 시작한다. 그 차이로부터 뒷심이 어떻게 발휘되느냐는 또다른 문제인 듯싶다. 많은 이야기가 탄생하고 소멸하는 동안 누구보다 가까운 곁에서 지켜본 사람들의 증언이, 수다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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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 루미코 걸작 단편집 박스세트 - 전3권다카하시 루미코 걸작 단편집 박스세트 - 전3권 - 10점
다카하시 루미코 지음/학산문화사(만화)


란마1/2과 이누야사 등으로 유명한 루미코 작가의 공력이 단순히 환상물에 집중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책들이다. 일상에서 겪을 수 있는 미묘한 갈등과 심리를 흥미진진하게 그려낸 단편들은 웬만한 소설보다 뛰어나다. 오히려 난 이게 너무 좋은 거지.
일단 각 권의 표제작만 살펴보자면...

P의 비극
동물 사육이 금지된 아파트에 사는 주인공. 사육 반대파도 찬성파도 아니지만 어차피 아무것도 기르지 않으니 신경 쓰지 않고 살았는데... 남편이 바이어의 펭귄을 잠시 맡아야 된다며 가져온다. 펭귄은 정말 사랑스럽지만, 잠시 맡아 두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는 사육 반대파의 선봉 주부에게 언제 들킬지 몰라 노심초사한다. 

붉은 꽃다발
회식에서 장기자랑하다 죽은 요시모토 과장. 혼령이 되어 자기 장례식을 보는데 아내와 아들의 표정이 너무 무덤덤해서 상처 받는다. 더해서 사실은 정리해고 1순위였다는 직장 동료들의 대화까지 듣어 상심에 상심. 그때 아내가 일하는 카페의 독신자 주인이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나타나는데...

전무의 개
친구이자 회사 상사인 전무가 주인공에게 200만엔이나 하는 애인의 개를 맡긴다. 아이들은 개를 보자마자 매직으로 눈썹을 그리고 애지중지 키워진 고급 개는 보살피기 조심스럽다. 엎친 데 덮쳐서 전무의 애인이 개 보자고 나타나고 나중에는 아예 본처까지 나타나 집안이 쑥대밭 되어 원형 탈모증까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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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가처럼 생각하기연출가처럼 생각하기 - 10점
마이클 블룸 지음/연극과인간


연출을 위한 실무 지침이 담겨 있다. 그동안 은근슬쩍 무대 주변을 기웃거린 정도로는 알 수 없었던, 실제적이고 미묘한 체험을 대신할 수 있었다. 뜬구름 잡는 이론서가 아니라 연극 그 자체라고 할 '행동'을 위해 연출가로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말해 준다. 제목은 '생각하기'지만 생각=행동의 실용이 기술되어 있다. 읽는 내내 실제 연극을 연출하는 거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서문에 써 있는 저자의 바람대로 연출의 경험을 상당히 전달해 주는 책이다. 
http://gompic.tistory.com2013-07-17T00:15:070.3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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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사용자/책 2013. 7. 11. 11:18

7년의 밤7년의 밤 - 10점
정유정 지음/은행나무


http://gompic.tistory.com2013-07-11T02:18:440.31010

2년 전인가? 동원훈련 가서 부대 내무실에 있는 걸 무심코 집어 들었는데 그해 훈련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이야기 자체가 흥미로웠는데. 더욱이 서술의 구조화가 매우 탁월했다. 잽 잽 스트레이트! 각 소주제는 일정한 리듬 속에 연결되어 있었고 변주를 가미해 독자의 긴장감을 높일 수밖에 없는 문장을 이어 갔다. 무엇보다 일종의 데미지 딜링이랄까, 그걸 이룩한 것은 군더더기 없는 묘사였다. 정서 변화와 사건 진행을 동시에 이끌어 내기 위해 기획된 정석적인 문체. 그것은 이야기를 위해 질주하지 않음에도 충분히 흡입력을 발휘했고 또한 아름답진 않아도 선명한 이미지를 선보였다. 거대한 탑의 계단을 하나하나 밟아 오르며 보는 풍경이라 할 수 있다. 점점 높아질수록 보이는 것은 많아지고 현기증은 심해진다. 그리고 번지점프! 마지막에 독자는 줄에 거꾸로 매달려 자신이 오른 기괴한 탑의 형태를 볼 수 있게 된다. 아마 이야기는 마무리되고 대부분 상쾌하게 책장을 덮을 거다. 삶에 변화를 주진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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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해지지만 않는다면 괜찮은 인생이야약해지지만 않는다면 괜찮은 인생이야 - 6점
세스 지음, 최세희 옮김/애니북스


http://gompic.tistory.com2013-07-03T06:37:290.3610

만화가 세스는 옛날 잡지에서 우연히 발견한 컷만화의 작가 캘로에게 집착하는데...

라고 적을 수도 있겠다, 아무래도. 작가가 작중인물과 자신을 굳이 구분하지 않는다. 애초에 왜 달라야 하는지 그 지점마저 그냥 통과해 버린다. 이야기는 음울하게 살아가는 세스가 뭔가 있어 보이는, 유독 끌리는 데가 있는 캘로의 만화를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엄마의 집으로 향하면서 시작된다. 만화... 카툰, 애니메이션 등등 세스가 첫 장에서 그것들에 대해 독백하는 장면이 처음과 끝이다. 그는 일체 기록을 구하기가 어려운 캘로의 삶에 결국 도달한다. 그의 가족을 만나 그가 삶을 잇기 위해 만화를 그만두었다는 것까지 알게 된다. 뭐 여기까지.

이처럼 누군가(작가 자신이든 타인이든)의 삶을 파고들어 핍진하게 묘사하면 끝에 가서 독자가 느낄 것은 부조리밖에 없는 듯하다. 이런 작품들이 많은 것은 그로부터 위안을 얻는 사람들이 있어서다. 


"조금 비참한 게 영혼에는 좋아요."

- 캘로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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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시창현시창 - 10점
임지선 지음, 이부록 그림/알마

현실은 시궁창. 임지선 기자가 들여다본 우리나라의 표면들이 담겨 있다. 이면이 아니라 표면이다. 이렇게까지 확실히, 더 할 수 없을 정도로 도드라져 있으니, 그래서 볼 수밖에 없는 것들이니 결코 몰랐다고 할 수 없다.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무엇보다 같은 사회 구성원으로부터 외면 당하고 무시(어쩌면 그보다 더한 경시) 받는 우리의 노예 친구들... 특히 이 나라는 젊음을 너무도 많이 저당 잡고 갉아먹었다! ...는 분노를 느낄 만한 내용들이 담겨 있다. 내 또래 지인들이 실제로 겪고 있는 이야기로 제목 현시창은 현재 시점의 상처라고 오독해도 될 듯하다.

http://gompic.tistory.com2013-05-01T11:57:550.3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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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춘씨에게도 봄은 오는가기춘씨에게도 봄은 오는가 - 10점
네온비 지음/애니북스

안 생기는 남자 기춘이 연애에 돌입하기까지 이야기. 

로맨틱 코미디 좋아하는 사람에게 추천한다. 골치 아플 거 없고 적정선의 개그 드립도 유쾌하게 읽힌다. 확실히 연애를 한 번도 안 해 본 남자는 매력이 없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일단 부딪히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왜? 어차피 될 놈은 되고 안 될 놈은 안 된다. 그러니까 일단 좋아지면 고백하는 거다! 그래, 차이면 슬퍼지고 말 거야. 이 명대사를 기억하렴.

"날씨가 참 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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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캐스트너가 다시 쓴 옛이야기 -전 5권에리히 캐스트너가 다시 쓴 옛이야기 -전 5권 - 10점
에리히 캐스트너 지음, 문성원 옮김/시공주니어

역시 에리히 캐스터라고나 할까? 입담 좋은 삼촌이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다. 엄청난 장편도 적당히 아주 잘 좋게 축약해 두었다. 작가 양반이 간간이 늘어놓는 잔소리에 참 정감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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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쾌한 희곡의 분석통쾌한 희곡의 분석 - 10점
데이비드 볼 지음, 김석만 옮김/연극과인간

http://gompic.tistory.com2013-03-06T07:14:000.31010

 

극작을 하고 싶은 내게 가장 실질적인 도움을 준 책. 작가뿐 아니라 배우나 연출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책이다. 습작을 하면서 타인에게 당하고(?) 싶었던 분석 방법론이 여기 담겨 있었다. 텍스트 자체에 끈질기게 집중하여 세밀하게 살핀다. 그 자체는 별거 아니지만 상당한 경험과 직관, 지식과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연결 고리를 찾아내고 인물이 행동하는 원리를 알고 사건의 진면모를 드러내야 하는 임무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무엇을 보고 그것들을 알 것인가? 저자는 희곡 자체를 실용적인 작품으로 규정한다. 기본적으로 테크네의 집합으로 보는 듯하다.  

 

"비유컨데연극예술가나 공연예술가에게는 시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아는 것이 지금이 몇 시인지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희곡의 구성요소들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고 난 후에 희곡의 의미를 발견하는 게 제대로 된 순서이다." 

 

서문에 쓴 인식대로 저자는 초반에 플롯 따위 개나 줘 버리라고 말한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기술하고 있지는 않다.) 우리나라에서 문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극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플롯을 꼽는 이들이 부지기수이다. 시학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고, 그런 면에서 이러한 선언은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는 자유롭게 또는 공학적으로 작품에 다가갈 수 있는 기반을 형성해 준다. 개인적으로 기계적인 분석론을 포기하거나 무시한 사람은 좋은 극인이 되기 힘들다고 생각하기에 크게 공감했다. 

 

또한 저자는 이 책의 목적을 연극이나 무대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여 제발 제대로 된 기술로 밥벌이 좀 잘하시게, 라고 표현하는데 어떤 무형의 힘이 움직이는 그릇의 기술 관계랄까 구조 관계를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의미, 오오 참된 의미를 찾는 이들에게 꽤나 물린 듯한 인상이다. 나 역시 그들에게 물리다 못해 역겨움을 느끼는 터라 이 책을 즐겁게 보았다. 작가로서 내가 도달하지 못한 어떤 지점이 보여 씁쓸하기도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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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천 개의 연극베를린, 천 개의 연극 - 10점
박철호 지음/반비


이 책은 저자가 베를린에 거주하며 쓴 관극 스케치이다. 레퍼토리 극장제에서 활성화된 독일 연극들을 보며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정리해서 담았다. 다만 책에 등장하는 총 16편의 무대 중에 2편은 스페인, 프랑스에서 상연된 것들이다.  

각 편의 이야기는 저자의 당시 근황으로 시작한다. 오늘은 어디를 갔고 누구를 만났고 어떠한 생각을 하다 이런 연극을 보았다는 식으로 정리된다. 자연스럽게 토로함으로써 현장감 넘치는 서술이다. 읽는 사람은 글줄을 따라가며 서서히 극장 안으로 입장하게 되고 저자의 눈과 귀를 통해 연극을 느낄 수 있다. 슬며시 찔러 주는 극 줄거리 소개와 연출적인 기법에 대한 감탄과 촌평, 배우들의 연기와 분장, 저자 자신의 가슴에서 끓어 오른 감정과 메시지에 반응하여 휘몰아치는 사유까지 적절한 걸음 속도로 안내해 준다. 간간이 연극사적 의미나 사회적 맥락을 짚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기에 굳이 연극에 관해 공부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독해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평론적이지 않지만 정보와 사유를 담고 있고 에세이적이지만 개인의 사상과 감정 배설에 머물지 않는다.  

나는 특히 국내에 잘 소개되지 않는 유럽 연극의 단면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저 머나먼 사랑티켓의 리즈 시절부터 대학로 거리를 쏘다녔지만 이제는 그 거리가 불만족한 나에게, 새롭게 다가온 이국의 거리는 충격과 감동이었다. 분명 이 책에는 좋은 것만 담았겠지만 그쪽 연극인들의 노력과 열정, 특히 연구는 연극열전 따위 프로젝트가 얼마나 얕은지 다시금 절실히 느끼게 해 주었다. 텍스트의 3차원화에 대개 만족하고 끝내 버리는 대학로에 던지는 의미가 크고, 한편으로는 이미 변화가 시작되어 이러한 책이 나타났다는 생각도 들었다. 읽는 내내 앉아 있던 낯선 세계의 객석에서 일어나야 하는 것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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